제대하고 일곱달 알바 하루 세탕 뛰고 겨우겨우 사글세 방 하나 구할 돈 학교 등록금 구하고 학교 복학을 다시 했던 2003년 3월이었다.
다시 학교에 복학하고 수업을 시작하고 학우들, 처음 보던 동아리 후배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잠시, 나는 또 다시 다음 학기와 매달 살아갈 생활비를 장만하기 위해 수업이 끝나면 바로 알바를 나가서 돈을 벌러 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다른 또레 친구들은 알바의 목적이 본인의 용돈이나 어떤 사고 싶은 목적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게 알바는 생업과 다를바 없었다.
2003년에는 이마트 계육담당으로 취업이 되어 오픈조, 마감조 바꿔가며 일을 했어야 했는데, 정규직 직원들은 주로 오후 5시면 마치는 오픈조를 하기를 원했으며, 나 또한 학교 수업 마치고 가려면 밤 10시 넘어야 마치는 마감조를 해야 했기에 항상 마감조를 맡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항상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려고 했었고, 그렇게 일로 인정받아야만 한 일자리에서 안정적인 수입을 얻어가며 생활 할 수 있었기에 정말 공부보다 더 돈 버는 일에 죽기 살기로 덤벼 드렸던 시절이었던것 같다.
어느 한 여름날, 내가 맡았던 계육 코너는 전국 이마트 지점에서 계육 코너 매출 전국 3등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성과를 올렸고, 관리직 팀장 또한 나를 많이 아껴주고 챙겨주려 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나는 어느 한 계육 회사의 하청업체 직원일 뿐...감성적인 칭찬 말고는 나에게 돌아 오는 보너스 하나 없었다.
복날이 다가 올때 쯤, 계육 코너가 더이상 하청 시스템이 아니라 직영 시스템으로 돌아가자고 검토 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우리 코너 담당 팀장은 나를 정규직화 시켜서 비록 대학생 신분이었다 할지라도 조금 더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던것 같았다. 정규직 사원을 신규 모집하지 않고 나를 정규직화 하려고 회사에 신청을 하였으며, 나는 들뜬 마음과 그 당시 함께 일했던 소고기 코너, 돼지고기 코너 형님들과 함께 좋은 소식이 오길 기대하고 기대하고 또 기대하며 결과만을 정규직 전환 소식 결과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국 매출 3등 안에 들었던 영업직. 그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고. 힘든일은 정말 가리지 않고 하고. 나 또한 지점장님 면담까지 하고 좋은 소식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기에, 하루하루를 더욱 더 열심히 일하고 목이 쉬도록 떨이 판매 세일을 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바로 잠이 들도록 일을 했었다.
그렇게 소식을 기다리던 중, 초복을 맞이 하였다. 올해 복날만은 전국에서 1등 판매를 해보리라. 나는 목청터지게 닭고기 판매를 울부 짖었고, 손님 앞에서 생닭을 손질하는 나의 손길 또한 그 어느때보다 더 현란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어떤 손님은 닭도리탕을 하게 잘라달라, 어떤 손님은 삼계탕을 한다. 어떤 손님은 목 비계를 제거 해달라, 어떤 손님은 닭가죽과 고기를 발라달라. 나는 이 모든 주문을 나무도 깎아 낼 듯한 묵직한 막칼 하나로 현란하게 칼질 하며 손질을 하고 순식간에 가공을 완성 시켜서 "감사합니다!! 또 와주셨으면 너무 기쁩니다!!"소리 지르고 손님에게 닭을 챙기고 돌아서려는 그 순간까지 웃음을 짓게 하려고 노력했던것 같다.
초복 날, 매출이 정말 좋은것을 느꼈다. 마감이 할 때쯔음, 닭은 이미 한판 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와...이 한판...6마리만 다 팔면 기록 세우는 건가....눈 앞이 약간 어지러워 질 정도로 피곤 했지만, 매출 기록에 욕심이 나던 나는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완판 하겠다는 의지로 마지막 떨이 세일을 목청 터지게 외치며 판매를 시작했었다.
그때, 어느 한 손님이 "저기, 닭 도리탕 한마리 해주세요"라고 주문이 왔기에 나는 기쁜 마음을 얼른 생닭 하나 집어 들고 막 칼로 날게 끝을 내려 찍어 잘라 내는 그 순간...
피곤 했던 건가...나의 왼손 엄지 손가락을 날개와 함께 잘라 버렸다.
시간이 멈추는 듯 했다.
'어....?' 하고 목장갑 하던 왼손을 들어봤는데, 목장갑 채로 내 엄지 손가락 하나가 잘려 나간게 보였고, 정맥이었나? 그것이 끊어져서 피가 흐르듯 나는게 아니라 솟아나듯 나는게 보여서 순간 놀란 마음에 엄지 손가락을 꽉 잡고 지혈을 하고, 눈 앞에서 놀란 손님보고는
"아...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다시 해드릴게요."하고 얼른 그 자리를 피해서 매장 뒷 창고로 뛰어가 팀장님을 외치듯 불렀다.
"팀장님!!! 팀장님!!! 저기 사모님!! 우리 팀장님 불러주세요!!!!!"
나는 창고 입구 한켠에 왼쪽 엄지손가락을 꽉 잡으며 지혈한 채 고통과 놀란 마음을 진정 시키려 호흡을 가파르게 했었다. 놀란 팀장이 나에게 달려 오며 말을 했다.
"무슨 일이고!!!"
"일단, 팀장님, 밖에 손님이 닭도리탕 시켰는데 기다리고 계세요. 놀랬던것 같은데 누구 한명 보내서 좀 대응 해주세요!"
팀장님은 얼른 돼지고기 코너 형님을 서포트로 보냈고, 나는 바로 한서병원 응급실로 실려가서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 들어가기 전에 잘린 엄지손가락에 마취 주사를 직접 꼽는데 어찌나 아프던지....침대가 부서지도록 발버둥을 쳐서 남자 의사 선생님 네명정도가 달려와서 내 몸을 꽉 잡았다...
아프고 너무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 소리 지르고...마취가 좀 들때쯤, 의사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잘린 손가락은 어쨌습니까....?"
"어.....;; 닭이랑 같이 짬에 버렸는데예;;;;"
"하....저런, 이걸 어쩌나....뼈가 안닿여서 다행히....좀 다듬을 수 있을거 같은데....엉덩이 살이라도 좀 붙일까요?""
뭐...아무튼, 알아서 해달라고 해서 그날 저녁에 수술은 마쳤고, 회사에서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던지, 우리 어머니는 그날 저녁에 백화점 알바 하던 중 바로 조퇴하고 부산에서 창원으로 넘어 오셨다.
입원 침실에서 누워 있던 내게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셨다.
"왜그랬어...."
어머니 목소리를 듣는 순간...나는 서로움과, 억울함과....미안함과.....아쉬움과....속상함과....화도나는 마음에.....목이 메이고 눈물이 그냥 하염없이 나는거 같아서 오른 팔로 내 얼굴을 가리고 숨죽여 흐느켜 울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울었던가.....
조금 마음이 진정이 되고 나서....나는 어머니와 눈도 제대로 마주 치지도 않고 말했다.
"돌아가....나는 괜찮아....여기 이마트에서 알아서 다 해줘...내일 또 출근 해야 되잖아. 심야버스 한시간 남았어. 돌아가..."
그렇게 어머니는 그날 밤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셨다.
다음날, 내가 소속되던 하청업체 사장님이 오셔서 병원비는 걱정 말고 치료 다 받아라 인사하고 음료수 한 박스 놔두고 가주셨고.
그 다음 날엔, 그때 서포트 해줬던 돼지고기 형님이 병문안을 와주셨다.
"용진아...." 형님 표정이 안좋았다.
"뭡니까 형님...."
"팀장님이 너무 미안해서 못오겠단다.....너 정사원 안된데....."
이번 사고 때문인가, 하청에서 정사원 올라가는게 규정상 어려워서 그래서 그런가....잘 모르지만, 그 형님은 아마 대표해서 그 말을 내게 하려고 왔던 것 같다.
"괘안습니다. 행님. 하하...손가락 잘렸더니 제 모가지 잘렸네예...."
형님 눈시울도 붉어 지면서 화가 많이 난 느낌이 그 표정에서 느껴졌다. 물론 회사에 대한 화가 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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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까지 네달은 걸렸던것 같다.
그 동안은 수입도 없었기에, 그 동안 모았던 돈도 다 깎아 먹어서 다음 학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휴학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쩌겠는가....내 팔자 인 것을.....
퇴원하고 나는 무슨 오기였을까...다시 그 하청 업체 직원의 입장으로 같은 장소에서 막칼을 잡으며 닭고기 판매하는 일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무섭지도 않냐고 트라우마는 없냐고 했는데....물론, 트라우마도 있었고, 그래도 정사원이 되지 못한 섭섭함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팀장이 그래도 그 부분은 배려 해줬던 것이다. 하청 사장님에게 나를 다시 고용해라고 말씀 해주셨단다....
나 대신에 들어온 전문대졸 정사원은 내 옆에서 같이 닭고기 판매를 하는 보직으로 배정 되었고....업무 자체는 내가 선배처럼 하지만 조직 구조상 내가 서포트 역할 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이라 일도 서툴고 판매에도 낯가림이 심해서 소극적인 친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그 친구는 정사원인 것을....
게다가 그 친구는 나와 나이도 같았다. 그래서 우린 친구처럼 대화도 하고 같이 일도 했지만, 서비스업을 처음 해보는 친구라 고객을 대할 때 목소리를 작아지고 어딘가 항상 불안한 거동을 하는 친구 였다.
정사원으로 채용 했지만, 그 친구는 4개월 뒤에 퇴사 하였다. 그렇다고 내가 정사원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새로운 친구가 들어왔다. 그 친구도 좀 오래 가나 했더니 그 친구 또한 4개월 정도 하더니 퇴사 하였다.
그렇다. 이 일은 정말 고되고 정신도 힘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사원이 될 수 없던....그런 2003년에서 2004년의 시대였다.
일년 정도 더 다녔을까....나도 그 일 자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밤에 일을 하기 시작했던 시절이....
여전히 그 돼지고기 형님은 그 이마트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 가끔 장보러 가다 마주치고 고기를 사게 될때면 덤을 좀 더 주신다.
그 형님과 나는...아직도 가끔 만나게 될때면 그 시절의 그 억울했던, 하지만 정말 진중하게 살았고 뜨겁게 일을 했던 그런 추억을 얘기 한다.
고된 것은 지나고 나면 다 술 안주가 되지만...아픔은 그대록 기억에 남는다.
그것을 우리는....아로 새긴 기억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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